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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김대중이 고향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지지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박정희와 김대중<10>
김대중은 목포상업학교 졸업 후 청년 사업가로 꽤 잘 나가면서도 정국 추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어린 시절에도 마을 구장인 부친에게 배달되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읽으면서 정치에 흥미를 가졌던 그였다. 목포상업학교 2학년 때 일본인 담임교사가 그에게 시국에 대한 스피치를 시켜보고 “일본 대의사(중의원 의원)가 의사당에서 한 것 손오공릴게임예시 못지않다”고 칭찬한 일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고 관련 지식을 쌓아 훌륭하게 스피치를 하는 소질이 있었다는 얘기다. 방향은 달랐지만 소년 박정희가 군인을 선망하며 병정놀이를 즐기고 대구사범학교 시절에는 교련 과목에서 특출한 역량을 보였던 것과 비견된다.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한 김대중...첫 야마토릴게임 정치 활동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다니던 중 해방을 맞은 김대중은 경영진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자 종업원 대표로 뽑혀 경영을 맡아 바쁘게 일하면서도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목포지부에 가담해 선전부원으로 활동했다. 주된 임무는 중앙에서 발표한 내용을 전단지나 벽보로 써서 알리는 일이었다. 사실상 첫 정치 활동에 나선 릴게임방법 셈이다.
김대중은 훗날 건준 가담 경위에 대해 “우리 민족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데 망설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건준은 해방 직후 민중이 지지하는 유일한 전국 규모의 정치세력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동생 대의와 함께 건준 벽보를 붙이다가 미 백경게임 군정청 경찰에 연행될 정도로 건준 활동에 열심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청년모임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김대중은 여운형이 이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사실상 첫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황금성릴게임사이트 그러나 좌·우익 세력을 망라해 결성되었던 건준이 좌익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우익 민족진영이 반발해 탈퇴하고 좌우 이념 대립이 깊어지면서 김대중은 1946년 초 건준에서 탈퇴했다. 이후 좌우 합작 노선을 내세운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결연하게 갈라섰다. 김대중은 이로써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좌익세력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금문당). 하지만 건준과 신민당 참여 경력은 훗날 김대중이 색깔론 사상공세를 당하는 빌미로 이용되었다.
김대중은 신민당에서 나온 뒤 우익에 속했던 장인의 권유로 우익진영인 한민당 목포지부 운영위원에 이름을 올렸지만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직접 해운 사업에 뛰어들어 사업기반을 넓혀 나갔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고,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자본가 반동이라는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형무소를 벗어난 김대중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 세 척이던 배 가운데 한 척은 당국에 징발됐고, 한 척은 폭격으로 밧줄이 잘리면서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려 한 척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다시 일어섰다. 징발됐다 반환된 한 척을 포함해 회사 보유 배가 다섯 척으로 늘었다. 여기에 다른 회사의 배를 전세 내어 십 수 척을 운용했다.
6·25 전쟁 때문에 부산에서 사업...그곳에서 만난 이희호 여사
전쟁 판세가 다시 기울어 서울이 공산군에 재점령 당했고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임시 수도 부산에는 모든 기관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도 사업 기반을 목포에서 부산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영도에 머물고 있던 조봉암(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 부의장 역임, 2대와 3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 진보당을 창당했다가 간첩죄로 사형을 당함. 2011년 대법원 재심무죄 판결로 사후 명예회복)씨를 찾아가 만났고, 김정례(2선 국회의원과 제5공화국에서 보건사회부장관 역임), 강영훈(예비역 중장, 노태우 정부 국무총리 역임)도 만났다. 그때 부산에는 ‘면우회’(勉友會)라는 모임이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들 모임인 ‘면학동지회’ 회원들이 피난지에서 다시 만나 명칭을 면우회로 바꿨다. 김대중은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이들과 어울려 인생과 철학, 조국의 내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훗날 첫 번째 아내 사별 후 재혼하게 되는 이희호도 이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젊은 시절의 김대중 이희호 부부. 김대중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해운사업을 했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모임인 '면우회' 멤버들과 어울렸다. 이 모임에서 훗날 첫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하게 되는 이희호를 처음 만났다. 연합뉴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 장기 집권 구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내 여야 구도 상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로는 더 이상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가 어려워지자 국민 직접 선거로 바꾸기 위해 헌법 개정에 나섰다. 이를 위해 자유당을 창당하고 폭력 조직과 우익단체를 동원해 관제 민중대회를 열어 민심을 조작했다. 마침내는 계엄령을 선포해 국제공산당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야당 의원들을 체포했다. 결국 경찰과 폭력배가 의사당을 둘러싼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1952년 7월 4일 국회의 발췌개헌안 표결 장면.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회 내 반 이승만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이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탄압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벌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지켜보며 현실 정치 참여 결심하다
이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김대중은 직접 정치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위정자의 거짓말은 결국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국민을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도 현실 정치 참여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연고지인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첫 출마를 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는 여당 자유당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야당인 민주국민당에서 공천 제의를 해왔지만 거절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목포지구 노동조합이 민주국민당 등 야당 후보로 출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목포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커 2대 총선에서 노조 출신이 당선됐다. 김대중의 모교인 목포상업학교 동창들도 발 벗고 나섰다.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은 김대중이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자의 요구와 입장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노동자 처우 개선에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한 듯 했다.
3대 민의원 선거 목포에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무참한 패배
김대중은 당선될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과 군청 등 관권이 선거에 적극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경찰은 노동조합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뒤 풀어줬다. 이들은 경찰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자유당 후보 지지 연설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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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6012814350001080
박정희와 김대중
①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정희...혈서를 써보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11318070002597)
② 물에 빠진 여학생 구한 교사 박정희...목포서 지프 몰던 사업가 김대중(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3110430000026)
③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03009410003490)
④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김대중의 간곡한 제안, 박정희는 끝내 거절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03009430003950)
⑤ 김대중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누나 젖먹고 큰 ‘늦둥이’ 박정희(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11811260002195)
⑥ 체구 작았지만 공부 잘한 '악바리'...박정희는 나이 많은 급우들의 뺨도 때렸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0219180003910)
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박정희와 김대중<10>
김대중은 목포상업학교 졸업 후 청년 사업가로 꽤 잘 나가면서도 정국 추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어린 시절에도 마을 구장인 부친에게 배달되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읽으면서 정치에 흥미를 가졌던 그였다. 목포상업학교 2학년 때 일본인 담임교사가 그에게 시국에 대한 스피치를 시켜보고 “일본 대의사(중의원 의원)가 의사당에서 한 것 손오공릴게임예시 못지않다”고 칭찬한 일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고 관련 지식을 쌓아 훌륭하게 스피치를 하는 소질이 있었다는 얘기다. 방향은 달랐지만 소년 박정희가 군인을 선망하며 병정놀이를 즐기고 대구사범학교 시절에는 교련 과목에서 특출한 역량을 보였던 것과 비견된다.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한 김대중...첫 야마토릴게임 정치 활동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다니던 중 해방을 맞은 김대중은 경영진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자 종업원 대표로 뽑혀 경영을 맡아 바쁘게 일하면서도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목포지부에 가담해 선전부원으로 활동했다. 주된 임무는 중앙에서 발표한 내용을 전단지나 벽보로 써서 알리는 일이었다. 사실상 첫 정치 활동에 나선 릴게임방법 셈이다.
김대중은 훗날 건준 가담 경위에 대해 “우리 민족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데 망설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건준은 해방 직후 민중이 지지하는 유일한 전국 규모의 정치세력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동생 대의와 함께 건준 벽보를 붙이다가 미 백경게임 군정청 경찰에 연행될 정도로 건준 활동에 열심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청년모임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김대중은 여운형이 이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사실상 첫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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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문에 부산에서 사업...그곳에서 만난 이희호 여사
전쟁 판세가 다시 기울어 서울이 공산군에 재점령 당했고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임시 수도 부산에는 모든 기관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도 사업 기반을 목포에서 부산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영도에 머물고 있던 조봉암(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 부의장 역임, 2대와 3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 진보당을 창당했다가 간첩죄로 사형을 당함. 2011년 대법원 재심무죄 판결로 사후 명예회복)씨를 찾아가 만났고, 김정례(2선 국회의원과 제5공화국에서 보건사회부장관 역임), 강영훈(예비역 중장, 노태우 정부 국무총리 역임)도 만났다. 그때 부산에는 ‘면우회’(勉友會)라는 모임이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들 모임인 ‘면학동지회’ 회원들이 피난지에서 다시 만나 명칭을 면우회로 바꿨다. 김대중은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이들과 어울려 인생과 철학, 조국의 내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훗날 첫 번째 아내 사별 후 재혼하게 되는 이희호도 이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젊은 시절의 김대중 이희호 부부. 김대중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해운사업을 했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모임인 '면우회' 멤버들과 어울렸다. 이 모임에서 훗날 첫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하게 되는 이희호를 처음 만났다. 연합뉴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 장기 집권 구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내 여야 구도 상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로는 더 이상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가 어려워지자 국민 직접 선거로 바꾸기 위해 헌법 개정에 나섰다. 이를 위해 자유당을 창당하고 폭력 조직과 우익단체를 동원해 관제 민중대회를 열어 민심을 조작했다. 마침내는 계엄령을 선포해 국제공산당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야당 의원들을 체포했다. 결국 경찰과 폭력배가 의사당을 둘러싼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1952년 7월 4일 국회의 발췌개헌안 표결 장면.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회 내 반 이승만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이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탄압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벌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지켜보며 현실 정치 참여 결심하다
이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김대중은 직접 정치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위정자의 거짓말은 결국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국민을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도 현실 정치 참여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연고지인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첫 출마를 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는 여당 자유당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야당인 민주국민당에서 공천 제의를 해왔지만 거절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목포지구 노동조합이 민주국민당 등 야당 후보로 출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목포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커 2대 총선에서 노조 출신이 당선됐다. 김대중의 모교인 목포상업학교 동창들도 발 벗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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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민의원 선거 목포에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무참한 패배
김대중은 당선될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과 군청 등 관권이 선거에 적극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경찰은 노동조합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뒤 풀어줬다. 이들은 경찰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자유당 후보 지지 연설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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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
①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정희...혈서를 써보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11318070002597)
② 물에 빠진 여학생 구한 교사 박정희...목포서 지프 몰던 사업가 김대중(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3110430000026)
③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03009410003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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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김대중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누나 젖먹고 큰 ‘늦둥이’ 박정희(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1181126000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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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