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릴리지Priligy 복용 후 사랑의 온도가 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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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우림외 작성일02-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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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은 단순히 신체적인 만족을 넘어, 연인이나 부부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조루증으로 인해 성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남성들은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자신감 상실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프릴리지Priligy입니다. 프릴리지는 조루증 치료제로, 성관계 시간을 연장하여 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프릴리지 복용 후 어떻게 사랑의 온도가 달라지는지, 그리고 효과적인 사용법과 주의사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프릴리지란 무엇인가?
프릴리지Priligy는 달라민dapoxetine 성분을 함유한 조루증 치료제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계열의 약물입니다. 이 약물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여, 성적 자극에 대한 민감도를 조절하고 사정 시간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관계 1~2시간 전에 복용하며, 약 3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됩니다. 프릴리지는 단기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복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2. 프릴리지 복용 후 달라지는 사랑의 온도
1 성관계 시간의 연장
프릴리지의 가장 큰 효과는 성관계 시간을 연장하여, 파트너와 더 오랫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조루증으로 인해 성관계가 짧게 끝나던 남성들은 프릴리지 복용 후 자신감을 되찾고,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인 만족을 넘어,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합니다.
2 심리적 안정감과 자신감 회복
조루증은 남성의 심리적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성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는 다시 조루증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듭니다. 프릴리지는 이러한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고, 자신감을 회복시켜줍니다. 성관계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파트너와의 관계도 더 편안해지고 사랑의 온도도 높아집니다.
3 파트너와의 관계 개선
조루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파트너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성관계가 짧게 끝나면 파트너도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고, 이는 관계의 긴장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프릴리지를 복용하면 파트너와의 성생활이 더 원활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깊어지며 관계가 개선됩니다.
3. 프릴리지의 효과적인 사용법
1 적절한 복용 시간과 용량
프릴리지는 성관계 1~2시간 전에 복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약물의 효과는 약 3시간 동안 지속되므로, 성관계를 계획한 시간에 맞춰 복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의사와 상담 후 적절한 용량을 결정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30mg 또는 60mg으로 시작하며,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습니다.
2 음식과의 상호작용
프릴리지는 음식과 함께 복용해도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는 약물의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기름진 음식은 약물의 흡수를 늦출 수 있으므로, 가벼운 식사와 함께 복용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3 정기적인 사용과 피드백
프릴리지는 필요할 때마다 복용하는 약물이지만, 정기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용 후 효과가 충분한지, 부작용은 없는지 등을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 의사와 상담하여 용량을 조절하거나 다른 치료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4. 프릴리지 복용 시 주의사항
1 부작용 이해하기
프릴리지는 일반적으로 안전한 약물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두통, 어지러움, 메스꺼움, 설사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은 대부분 경미하며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지속되거나 심각한 경우 의사와 상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
프릴리지는 다른 SSRI 계열의 항우울제나 혈압약 등과 함께 복용할 경우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약물을 복용 중이라면 반드시 의사와 상의한 후 프릴리지를 복용해야 합니다.
3 기저 질환 확인
심혈관 질환이나 간기능 장애가 있는 경우, 프릴리지 복용 전에 의사와 상담해야 합니다. 또한, 조루증이 심리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이라면, 약물 치료와 함께 상담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5. 프릴리지와 함께 사랑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
1 파트너와의 소통
프릴리지는 성생활의 질을 개선해주지만, 파트너와의 소통이 없다면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치를 나누고, 성생활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습니다.
2 로맨틱한 분위기 조성
성생활은 단순히 신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서적인 교감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프릴리지를 복용한 후에는 파트너와의 로맨틱한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캔들라이트 디너, 편안한 음악, 혹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사랑의 온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3 건강한 생활습관 유지
프릴리지는 일시적으로 조루증을 해결해주지만, 장기적으로 성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강한 생활습관이 필수적입니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은 전반적인 건강을 증진시키고, 이는 성기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6. 프릴리지, 사랑의 온도를 높이는 도우미
프릴리지는 조루증으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약물입니다. 성관계 시간을 연장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며, 파트너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프릴리지는 단순히 약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와의 소통과 건강한 생활습관과 함께 사용할 때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프릴리지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행복한 성생활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기자 admin@119sh.info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다음날인 2004년 10월22일 발행된 경향신문 1면.
2026년 새로운 시간의 문턱에서, 새로운 지면을 펼쳐나갈 생각을 하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앞으로 이곳에서는 한국의 역사 공간과 문화유산을 글감으로 삼아 지금의 우리를 낯설게 비춰볼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역사학은 단순히 박제된 기억의 나열이 아니다. 익숙한 현재를 낯설게 함으로써 오늘을 다르게 상상하게 하는 ‘역사 상상력’의 힘이야말로 우리가 지녀야 할 도구다. 그 첫 질문으로, 서울이 수도라 오징어릴게임 는 사실이 과연 처음부터 당연했는지 묻고 싶다.
서울이 ‘서울 됨’은 당연한가
20여년 전 대한민국을 뒤흔든 ‘관습 헌법’ 논란을 기억하는가.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는 노무현 정부에서 야심 차게 추진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우리나라 수도는 서울이라고 헌법에 명시되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어 있지는 않아도 관습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므로 신행정수도 건설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판결의 근거는 조선시대 이래 600여년 동안 서울이 수도라는 점이 당연한 규범적 사실로 인정받아 왔으며, 한 번도 그 관행이 중간에 깨진 적도 없고 어떤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없다는 점 등이었다.
릴박스 2004년 10월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8 대 1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왼쪽 사진). 1849년 간행된 동국여지도 중 경기 부분. ‘경(京)’이라는 글자가 성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형상화해 19세기 중반 수도 한양이 확실한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개성은 다른 지역과 별 차이 없이 표현돼 있다. 경향DB· 야마토게임장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새삼스럽게 2004년 헌재 판결을 서두로 가져온 것은 당시 결정이 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타당한지를 다시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600여년 전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일이 21세기 서울의 흔들림 없는 수도로서의 위상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정도로 대단한 역사적 중 한국릴게임 량감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무라야마 지준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한양의 역사적 중량감을 평가했다. 그는 조선인 지관을 대동하고 전국을 다니며 풍수 설화 및 이론과 사례를 수집하여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 책에서 무라야마는 한양의 지세와 역사를 개괄한 후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의 지리는 풍수적으로 잘 갖추어져 국도로서 적합한 곳이다. 예부터 수도로 선정된 것이 그다지 의아할 것이 없”을 정도이며, 고려시대부터 역사까지 따지면 “풍수 천 년의 도읍”이라고까지 일컬을 만하다고 말이다.
풍수적인 측면에서 한양을 높이 평가한 것은, 무라야마보다 200여년 앞서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1690~1756)도 마찬가지였다. 한양 주변을 둘러싼 지세의 몇가지 단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는 한양이 “천상의 수도이자 훌륭한 도읍 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도성 안의 “흙이 맑고 깨끗하며 단단하고 희어서 길에 떨어뜨린 밥알을 주워 먹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그 형국이 밝고 산뜻하다고 찬탄했다. 이중환과 무라야마의 이야기들은 풍수의 언설을 빌려 서술되기는 했으나, 한양이 수도일 수밖에 없는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이유가 있으며 그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강고한 확신들이 층층이 쌓여 헌재가 결정요지에서 언급한, 서울이 수도라는 당연한 규범적 사실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곗바늘을 돌려 600여년 전 처음 한양 천도를 논의할 때로 돌아가 당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그들도 같은 대답을 할까? 실록에는 당대인들의대답이 이미 나와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부소 명당(개경, 지금의 개성)이 첫째요, 남경(한양)이 다음입니다.”(<태조실록> 태조 3년 8월11일) 한양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개경 다음가는 땅 정도였다.
한양은 개경 다음일 뿐
“드디어 송경(松京·개경)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에 도성 사람들이 모두 옛 수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끊이질 않으니, 성문을 지켜 제지했다.”(<정종실록> 정종 1년 2월26일)
1399년(정종 1)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 참배를 명분으로 송경을 방문한 정종은 환도를 결정한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지 햇수로 5년, 후계 문제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지 꼭 반년 만의 일이었다. 왕자들끼리의 볼썽사나운 내분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되돌려보려는 자구책의 하나였다. 환도 결정에 대한 위와 같은 반응은 당대인들이 한양 천도에 얼마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또 옛 도읍 개경에 얼마나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의 한양 천도는 태조 이성계가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한 끝에 단행될 수 있었다. 건국한 지 한 달 만에 내린 한양 천도 명령부터 계룡산 신도읍 건설에 이르기까지 이성계의 천도 시도는 번번이 개국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의 갈등은 계룡산 천도 후보지를 보러 갈 때 벌어진 설전에서 잘 드러난다.
1393년(태조 2) 이성계는 계룡산의 후보지를 직접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당시 행차에는 남은(1354~1398)만 수행했을 뿐, 정도전(1342~1398) 등 다른 개국공신들은 따르지 않았다. 개국공신들의 미온적 기류를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어가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 개경의 도평의사사에서는 현비(신덕왕후 강씨)의 병환과 도적 떼의 소요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것이 천도 행차를 저지하기 위한 핑계임을 간파하고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는 것”이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했다. 이어 여전히 도적 핑계를 대는 남은에게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면전에서 일갈했다.(<태조실록> 태조 2년 2월1일)
이런 분위기를 뚫고 어렵게 이뤄낸 한양 천도가 물거품이 되고 왕위에서도 쫓겨나 태상왕 신세로 한양을 떠나던 날, 이성계는 아내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을 두루 돌아보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처음에 한양으로 옮긴 것은 내 뜻만이 아니었고, 나라 사람들과 의논한 것이었다.”(<정종실록> 정종 1년 3월7일)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한양 천도가 얼마나 그가 고집해 단행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천도를 원하지 않는 다수의 분위기와 무조건 어디든 천도를 원하는 태조의 입장이 격돌한 속에서 절충 방안으로 선택된 곳이 남경, 즉 한양이었다. 개경과 가까워 국토의 중앙 입지라는 조건을 충족하고 조운과 같은 물류망도 크게 바꿀 필요가 없으며, 고려 말에 이미 제2의 도시로 번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는 여전히 송경이 가장 좋고 한양은 그다음 정도로 꼽히기는 했으나, 재상들조차 기어이 천도를 하겠다면 그나마 이곳이 낫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절충지였다.(<태조실록> 태조 3년 8월13일)
이성계가 한양 천도 추진할 때
당대인들은 ‘개성’을 더 선호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도 반대
인정받지 못했던 서울 떠올리며
과거 ‘수도이전’ 위헌 결정 고찰
관행도 깨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정종 대 개경으로 환도한 후 태종 대 내내 한양 재천도를 놓고 논의가 분분했으나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성계의 고집과 태종의 결심으로, 1404년(태종 4) 어렵사리 한양 천도가 결정됐음에도 이듬해 천도를 실행할 무렵에는 다시금 반대론이 일었을 정도였다. 자리 이전에 보수적인 상인들은 개경과 한양 양쪽에 집을 지어놓고 이리저리 재산과 물건을 옮기며 관청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천도에 집착한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의 옛 수도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는 더욱 부풀어 올랐다. 마침 1409년(태종 9), 1410년(태종 10) 연이어 태종이 개경에 행차하자 관리들은 진짜로 천도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는 길에 가족들을 모두 대동하고 이삿짐까지 바리바리 싣고 한양을 떠난 것이다. 일반 도성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양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에는 이삿짐을 이고 진 도성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떠난 틈을 타 남은 이들이 한양의 빈집들을 헐어버릴까 걱정할 지경이었다.(<(<태종실록> 태종 10년 10월11일) 처음 천도한 후 20년이 지나도록 한양은 여전히 확고한 일극의 수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한양이 처음부터 당연스레 수도가 되진 못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이 오랜 기간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변화되고 새롭게 축적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가 600여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못하는 것처럼, 당대인들은 475년 유지된 옛 왕조의 수도 개경이 지닌 역사적 관성과 위상에 영향을 받았다. 세종 대 이후 한양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사람들의 심상에서까지 확고한 위상을 갖지는 못했다. 한양은 수도로 만들어지고 서서히 수도가 되어갔다. 수도권 집중화라는 거대한 관성 속에 사는 지금, 600년 전 한양을 향한 거부감의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호사가적 취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시대를 낯설게 보고 새로운 길을 찾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26년 새로운 시간의 문턱에서, 새로운 지면을 펼쳐나갈 생각을 하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앞으로 이곳에서는 한국의 역사 공간과 문화유산을 글감으로 삼아 지금의 우리를 낯설게 비춰볼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역사학은 단순히 박제된 기억의 나열이 아니다. 익숙한 현재를 낯설게 함으로써 오늘을 다르게 상상하게 하는 ‘역사 상상력’의 힘이야말로 우리가 지녀야 할 도구다. 그 첫 질문으로, 서울이 수도라 오징어릴게임 는 사실이 과연 처음부터 당연했는지 묻고 싶다.
서울이 ‘서울 됨’은 당연한가
20여년 전 대한민국을 뒤흔든 ‘관습 헌법’ 논란을 기억하는가.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는 노무현 정부에서 야심 차게 추진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우리나라 수도는 서울이라고 헌법에 명시되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어 있지는 않아도 관습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므로 신행정수도 건설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판결의 근거는 조선시대 이래 600여년 동안 서울이 수도라는 점이 당연한 규범적 사실로 인정받아 왔으며, 한 번도 그 관행이 중간에 깨진 적도 없고 어떤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없다는 점 등이었다.
릴박스 2004년 10월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8 대 1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왼쪽 사진). 1849년 간행된 동국여지도 중 경기 부분. ‘경(京)’이라는 글자가 성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형상화해 19세기 중반 수도 한양이 확실한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개성은 다른 지역과 별 차이 없이 표현돼 있다. 경향DB· 야마토게임장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새삼스럽게 2004년 헌재 판결을 서두로 가져온 것은 당시 결정이 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타당한지를 다시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600여년 전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일이 21세기 서울의 흔들림 없는 수도로서의 위상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정도로 대단한 역사적 중 한국릴게임 량감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무라야마 지준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한양의 역사적 중량감을 평가했다. 그는 조선인 지관을 대동하고 전국을 다니며 풍수 설화 및 이론과 사례를 수집하여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 책에서 무라야마는 한양의 지세와 역사를 개괄한 후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의 지리는 풍수적으로 잘 갖추어져 국도로서 적합한 곳이다. 예부터 수도로 선정된 것이 그다지 의아할 것이 없”을 정도이며, 고려시대부터 역사까지 따지면 “풍수 천 년의 도읍”이라고까지 일컬을 만하다고 말이다.
풍수적인 측면에서 한양을 높이 평가한 것은, 무라야마보다 200여년 앞서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1690~1756)도 마찬가지였다. 한양 주변을 둘러싼 지세의 몇가지 단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는 한양이 “천상의 수도이자 훌륭한 도읍 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도성 안의 “흙이 맑고 깨끗하며 단단하고 희어서 길에 떨어뜨린 밥알을 주워 먹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그 형국이 밝고 산뜻하다고 찬탄했다. 이중환과 무라야마의 이야기들은 풍수의 언설을 빌려 서술되기는 했으나, 한양이 수도일 수밖에 없는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이유가 있으며 그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강고한 확신들이 층층이 쌓여 헌재가 결정요지에서 언급한, 서울이 수도라는 당연한 규범적 사실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곗바늘을 돌려 600여년 전 처음 한양 천도를 논의할 때로 돌아가 당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그들도 같은 대답을 할까? 실록에는 당대인들의대답이 이미 나와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부소 명당(개경, 지금의 개성)이 첫째요, 남경(한양)이 다음입니다.”(<태조실록> 태조 3년 8월11일) 한양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개경 다음가는 땅 정도였다.
한양은 개경 다음일 뿐
“드디어 송경(松京·개경)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에 도성 사람들이 모두 옛 수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끊이질 않으니, 성문을 지켜 제지했다.”(<정종실록> 정종 1년 2월26일)
1399년(정종 1)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 참배를 명분으로 송경을 방문한 정종은 환도를 결정한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지 햇수로 5년, 후계 문제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지 꼭 반년 만의 일이었다. 왕자들끼리의 볼썽사나운 내분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되돌려보려는 자구책의 하나였다. 환도 결정에 대한 위와 같은 반응은 당대인들이 한양 천도에 얼마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또 옛 도읍 개경에 얼마나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의 한양 천도는 태조 이성계가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한 끝에 단행될 수 있었다. 건국한 지 한 달 만에 내린 한양 천도 명령부터 계룡산 신도읍 건설에 이르기까지 이성계의 천도 시도는 번번이 개국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의 갈등은 계룡산 천도 후보지를 보러 갈 때 벌어진 설전에서 잘 드러난다.
1393년(태조 2) 이성계는 계룡산의 후보지를 직접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당시 행차에는 남은(1354~1398)만 수행했을 뿐, 정도전(1342~1398) 등 다른 개국공신들은 따르지 않았다. 개국공신들의 미온적 기류를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어가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 개경의 도평의사사에서는 현비(신덕왕후 강씨)의 병환과 도적 떼의 소요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것이 천도 행차를 저지하기 위한 핑계임을 간파하고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는 것”이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했다. 이어 여전히 도적 핑계를 대는 남은에게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면전에서 일갈했다.(<태조실록> 태조 2년 2월1일)
이런 분위기를 뚫고 어렵게 이뤄낸 한양 천도가 물거품이 되고 왕위에서도 쫓겨나 태상왕 신세로 한양을 떠나던 날, 이성계는 아내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을 두루 돌아보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처음에 한양으로 옮긴 것은 내 뜻만이 아니었고, 나라 사람들과 의논한 것이었다.”(<정종실록> 정종 1년 3월7일)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한양 천도가 얼마나 그가 고집해 단행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천도를 원하지 않는 다수의 분위기와 무조건 어디든 천도를 원하는 태조의 입장이 격돌한 속에서 절충 방안으로 선택된 곳이 남경, 즉 한양이었다. 개경과 가까워 국토의 중앙 입지라는 조건을 충족하고 조운과 같은 물류망도 크게 바꿀 필요가 없으며, 고려 말에 이미 제2의 도시로 번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는 여전히 송경이 가장 좋고 한양은 그다음 정도로 꼽히기는 했으나, 재상들조차 기어이 천도를 하겠다면 그나마 이곳이 낫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절충지였다.(<태조실록> 태조 3년 8월13일)
이성계가 한양 천도 추진할 때
당대인들은 ‘개성’을 더 선호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도 반대
인정받지 못했던 서울 떠올리며
과거 ‘수도이전’ 위헌 결정 고찰
관행도 깨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정종 대 개경으로 환도한 후 태종 대 내내 한양 재천도를 놓고 논의가 분분했으나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성계의 고집과 태종의 결심으로, 1404년(태종 4) 어렵사리 한양 천도가 결정됐음에도 이듬해 천도를 실행할 무렵에는 다시금 반대론이 일었을 정도였다. 자리 이전에 보수적인 상인들은 개경과 한양 양쪽에 집을 지어놓고 이리저리 재산과 물건을 옮기며 관청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천도에 집착한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의 옛 수도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는 더욱 부풀어 올랐다. 마침 1409년(태종 9), 1410년(태종 10) 연이어 태종이 개경에 행차하자 관리들은 진짜로 천도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는 길에 가족들을 모두 대동하고 이삿짐까지 바리바리 싣고 한양을 떠난 것이다. 일반 도성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양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에는 이삿짐을 이고 진 도성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떠난 틈을 타 남은 이들이 한양의 빈집들을 헐어버릴까 걱정할 지경이었다.(<(<태종실록> 태종 10년 10월11일) 처음 천도한 후 20년이 지나도록 한양은 여전히 확고한 일극의 수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한양이 처음부터 당연스레 수도가 되진 못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이 오랜 기간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변화되고 새롭게 축적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가 600여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못하는 것처럼, 당대인들은 475년 유지된 옛 왕조의 수도 개경이 지닌 역사적 관성과 위상에 영향을 받았다. 세종 대 이후 한양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사람들의 심상에서까지 확고한 위상을 갖지는 못했다. 한양은 수도로 만들어지고 서서히 수도가 되어갔다. 수도권 집중화라는 거대한 관성 속에 사는 지금, 600년 전 한양을 향한 거부감의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호사가적 취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시대를 낯설게 보고 새로운 길을 찾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