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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Ⅲ. 백강 전투에서 태산 봉선까지 탐라의 행보(663~666)
백 우주전함야마토게임 제부흥운동이 실패로 귀결된 분기점은 663년 8월에 벌어졌던 백강 전투였다. 663년 8월 27~28일 이틀간 벌어진 백강 전투의 결과는 왜의 수군 배 400척이 불타는 왜국과 백제부흥군의 완패로 끝났다. 그런데 백강 전투에 당과 신라, 백제부흥군‧왜국뿐만 아니라 탐라가 참전한 듯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탐라가 어떤 형태로든지 백강 전투에 참전 내지 관여되어 야마토게임방법 있었던 것이다.
탐라가 백강 전투에 참전한 배경은 무엇일까? 탐라국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일지 아니면 백제부흥군 내지 왜국의 요청에 따른 것인지 궁금하다. 탐라의 백강 전투 참전이 자발적 선택이었다면 663년 3월에 왜가 27,000명을 파병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탐라가 왜의 출병을 인지하였다면 왜군의 지지를 받은 백제부흥군 바다신2릴게임 세력이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을 것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나․당 연합군이 당장 탐라에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될 전투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참전한 까닭은 좀 더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백제 부흥군의 풍왕은 663년 6월 복신을 제거한 후 고구려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당 손오공게임 시 당에서 파병한 손인사의 수군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왜는 663년 3월에 이어 8월에 1만여 명의 추가 병력을 보냈다. 백강 전투 때 불에 타 침몰한 왜의 배가 400척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수군의 역할과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풍왕은 고구려와 왜국뿐 아니라 탐라에게도 파병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구당서』 유인궤전 사이다쿨 은 백강 전투 때 항복한 탐라를 '탐라국사(耽羅國使)'로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탐라가 백강 전투에 군사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부흥 백제국에 정세 파악을 위해 온 사절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 그런데 『태평어람』은 백강 전투가 끝나고 항복의 절차 때 탐라와 왜의 사신이 파견된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본 전투에서 왜와 탐라의 병력을 전제로 하는 문구이다. 따라서 『구당서』 유인궤전의 '탐라국사'에 매몰될 필요는 없겠다. 애초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사 없이 사신만 파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풍왕이 탐라에게 기대한 군사 원조는 수군 병력일 가능성이 크다. 탐라가 7세기 중․후반 당․신라․일본을 상대로 역동적으로 이어간 외교 행보는 탐라의 독자적 조선술(造船術)과 항해 능력이 뒷받침되었다. 『당회요』에 따르면, 탐라에는 활․칼․창․방패 같은 무기가 있었다. 이는 탐라 나름의 군사력을 보유했음을 시사한다. 탐라 입장에서 육군보다는 섬을 방어하거나 대외 교역을 위해 바다를 오가는 배를 호위하는 수군이 현실적으로 더 필요했을 듯하다.
탐라의 백강 전투 참전은 탐라의 대외관계 향방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후 벌어진 백제와 신라 간 취리산 회맹(665.8) 및 태산 봉선(666.1)에 탐라가 계속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부흥운동은 백강 전투 패배 후 주류성과 임존성까지 함락당하면서 기세가 크게 꺾이며 종식되었다.
당 고종은 옛 백제 영역의 통치가 안정되자 태산에서의 봉선제사를 다시 추진하였다. 고종은 664년 7월에 666년 1월 태산에서 봉선할 것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공적이고 개방적인 봉선을 기획하였다. 이는 태산 봉선이 주변 국가를 총망라한 국제적인 행사로 추진되었음을 시사한다. 고종은 664년 7월 봉선 실시 선포와 동시에 주변 국가들에도 참가를 독려하는 사신을 보냈다. 665년 10월에 당 고종이 태산에 가기 위해 동도[낙양]를 출발할 때 외국 사신으로서 동쪽의 고구려․백제․신라․왜국으로부터 서쪽의 돌궐․파사․천축국 등이 행보를 함께 하였다.
이로써 보면, 664년 2월[웅령 회맹]과 665년 8월[취리산 회맹]에 당 측의 주선으로 거행된 신라와 백제 간 두 차례의 회맹도 봉선 개최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성격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취리산 회맹 후 유인궤는 곧바로 태산 봉선 참가를 위해 회맹 당사국인 백제․신라는 물론이거니와 탐라와 왜국까지 대동하는 행보를 보였다.
유인궤와 함께한 네 나라의 대표자는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추장'으로 표현하였고, 나머지 사서는 '사신'으로 기술하였다. 상호 배치된다기보다는 일정 규모의 사신단이 파견되었고, 그중 추장으로 표현될 법한 책임자가 있었을 것이다.
백제 측은 일단 취리산 회맹의 참여 주체였던 웅진도독 부여융이 대표자였다. 신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이 사절단을 이끌고 태산의 봉선에 참여하였다. 당 고종은 불과 얼마 전인 662년까지 전쟁을 벌였고, 향후에도 가장 유력한 정벌 대상인 고구려에도 봉선 참여를 독려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에 고구려는 보장왕(642~668)의 태자 복남을 보내 봉선에 참가시켰다. 취리산 회맹 후 유인궤의 인솔하에 왜국도 신라․백제․탐라와 함께 태산 봉선에 참석하였다. 고종은 663년 8월 백강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러 패퇴시켰던 상대 국가를 회유하여 취리산 회맹을 참관하게 하고, 이어 태산 봉선까지 데려간 것이다. 그렇다면 탐라국도 다른 국가들에 준하는 중요 인물을 태산 봉선의 사신단으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7세기 중․후반 탐라의 대일 외교에서 주로 왕자가 활약했으므로, 태산 봉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봉선이 한창일 때인 666년 1월 탐라는 왕자 고여를 일본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렇지만 왕자는 여러 명 있을 수가 있다. 일례로 673년 탐라의 사신단으로서 일본에 간 왕자는 구마예‧도라‧우마 3명이었다. 태산 봉선을 전후한 시기 탐라의 왕자로 기록에 남겨진 인물은 각각 661년 5월과 669년 3월에 일본에 파견된 아파기와 구마기가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탐라 사신단을 이끌고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 고종은 주변 국가의 복속을 통해 이룬 평화의 구축을 하늘에 고하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거대한 의식을 태산 봉선으로 풀어냈다. 완벽한 봉선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벌 고구려를 설득하였고, 백강 전투 등에서 적국으로 맞서 싸웠던 백제․왜․탐라의 참가를 이끌어냈다.
탐라가 신라의 속국으로서 취리산 회맹과 태산에서의 봉선에 참가했다는 견해가 있다. 662년 2월 탐라국주가 문무왕을 찾아가 속국이 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탐라는 백제 측에 서서 663년 8월 백강 전투에 참전하였다. 탐라의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 참가는 그 연장선상에서의 외교 행보였다. 물론 이는 당 측의 의도와 기획에 따른 성격이 짙었다.
탐라는 왜국과 함께 백제 측에 선 국가로서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탐라가 각종 기록에 삼국 및 왜국과 대등한 존재의 독립국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이 탐라를 독자적인 국가로 인식했고 그에 합당하게 대우했음을 시사한다. 탐라는 태산에서 개최된 봉선 참여를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몸소 느꼈을 법하다. 또한 봉선에 참가한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정보를 얻고 향후 외교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은영, 「7세기 후반 일본의 耽羅使 파견 의의와 對中交通路의 변화」,『新羅史學報』 44, 신라사학회, 2018.고경석, 「장보고 세력의 경제적 기반과 신라 서남해 지역」, 『韓國古代史硏究』39, 한국고대사학회, 2005.국립제주박물관, 『탐라』(2018 기획특별전), 2018.김경주, 「문헌과 고고자료로 본 탐라의 대외교류」, 『湖南考古學報』58, 호남고고학회, 2018.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백제 고토 지배 정책」, 『先史와 古代』 31, 한국고대학회, 2009.김영관, 「백제 멸망후 扶餘隆의 행적과 활동에 대한 재고찰」, 『百濟學報』 7, 백제학회, 2012.김영관, 「탐라의 국제관계와 외교」, 『새롭게 쓴 탐라사』,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2024.김영관, 『百濟復興運動硏究』, 서경, 2005.김은숙, 「백제부흥운동 이후 天智朝의 국제관계」, 『日本學』15,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1995.김태식, 「唐 高宗 封禪大典, 그 예행 의식으로서의 취리산 회맹」, 『韓國古代文化硏究』, 백산자료원, 2005.김현구, 『동아시아 세계와 백촌강 싸움』,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박남수, 「탐라국의 동아시아 교섭과 신라」, 『耽羅文化』 58, 2018: 『고대 동아시아와 탐라』,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2019.박민경, 「웅진도독부의 대왜정책 검토」, 『Homo Migrans』24, 이주사학회, 2021.박지현, 「白江口 전투 이후 扶餘隆의 행적과 熊津都督府의 운영」, 『역사와 현실』 105, 한국역사연구회, 2017.서영교, 「乾封元年(666) 封禪문제와 唐의 대고구려 정책」, 『大丘史學』120, 대구사학회, 2015.서영교, 「熊津都督府의 對倭交涉과 乾封(666) 封禪」, 『東아시아古代學』 55,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송완범, 「백촌강 싸움과 倭」, 『韓國古代史硏究』 45, 2007: 『동아시아세계 속의 일본율령국가 연구』, 경인문화사, 2020.유승훈,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푸른역사, 2012.이근우, 「熊津時代 백제의 南方境域에 대하여」, 『百濟硏究』 27,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7.이근우, 「탐라국 역사 소고」, 『釜大史學』 30, 부산사학회, 2006.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고구려의 대응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高句麗渤海硏究』64, 고구려발해학회, 2019.이승호, 「5~8세기 耽羅國의 대외교류와 진상‧조공 품목」, 『東國史學』 70, 동국사학회, 2021.이유진, 「탐라의 대일교섭」, 『耽羅文化』 58, 2018: 『고대 동아시아와 탐라』,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2019.이재석, 「7세기 후반 百濟復興運動의 두 노선과 倭國의 선택」, 『百濟硏究』57, 충남대 백제연구소, 2013.장창은, 「문헌으로 본 고대 탐라국」, 『탐라耽羅』(국립제주박물관 기획특별전), 국립제주박물관, 2018.진영일, 『고대 중세 제주역사 탐색』,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08.최희준, 「탐라국의 대외교섭과 항로」, 『耽羅文化』 58, 2018: 『고대 동아시아와 탐라』,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2019.하워드 J. 웨슬러 지음․임대희 옮김, 『비단같고 주옥같은 정치』, 고즈윈, 2005.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80호(2025.11)에 '7세기 중반 탐라의 외교 행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논문을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장창은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고대사 전공.
Ⅲ. 백강 전투에서 태산 봉선까지 탐라의 행보(663~666)
백 우주전함야마토게임 제부흥운동이 실패로 귀결된 분기점은 663년 8월에 벌어졌던 백강 전투였다. 663년 8월 27~28일 이틀간 벌어진 백강 전투의 결과는 왜의 수군 배 400척이 불타는 왜국과 백제부흥군의 완패로 끝났다. 그런데 백강 전투에 당과 신라, 백제부흥군‧왜국뿐만 아니라 탐라가 참전한 듯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탐라가 어떤 형태로든지 백강 전투에 참전 내지 관여되어 야마토게임방법 있었던 것이다.
탐라가 백강 전투에 참전한 배경은 무엇일까? 탐라국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일지 아니면 백제부흥군 내지 왜국의 요청에 따른 것인지 궁금하다. 탐라의 백강 전투 참전이 자발적 선택이었다면 663년 3월에 왜가 27,000명을 파병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탐라가 왜의 출병을 인지하였다면 왜군의 지지를 받은 백제부흥군 바다신2릴게임 세력이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을 것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나․당 연합군이 당장 탐라에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될 전투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참전한 까닭은 좀 더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백제 부흥군의 풍왕은 663년 6월 복신을 제거한 후 고구려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당 손오공게임 시 당에서 파병한 손인사의 수군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왜는 663년 3월에 이어 8월에 1만여 명의 추가 병력을 보냈다. 백강 전투 때 불에 타 침몰한 왜의 배가 400척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수군의 역할과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풍왕은 고구려와 왜국뿐 아니라 탐라에게도 파병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구당서』 유인궤전 사이다쿨 은 백강 전투 때 항복한 탐라를 '탐라국사(耽羅國使)'로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탐라가 백강 전투에 군사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부흥 백제국에 정세 파악을 위해 온 사절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 그런데 『태평어람』은 백강 전투가 끝나고 항복의 절차 때 탐라와 왜의 사신이 파견된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본 전투에서 왜와 탐라의 병력을 전제로 하는 문구이다. 따라서 『구당서』 유인궤전의 '탐라국사'에 매몰될 필요는 없겠다. 애초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사 없이 사신만 파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풍왕이 탐라에게 기대한 군사 원조는 수군 병력일 가능성이 크다. 탐라가 7세기 중․후반 당․신라․일본을 상대로 역동적으로 이어간 외교 행보는 탐라의 독자적 조선술(造船術)과 항해 능력이 뒷받침되었다. 『당회요』에 따르면, 탐라에는 활․칼․창․방패 같은 무기가 있었다. 이는 탐라 나름의 군사력을 보유했음을 시사한다. 탐라 입장에서 육군보다는 섬을 방어하거나 대외 교역을 위해 바다를 오가는 배를 호위하는 수군이 현실적으로 더 필요했을 듯하다.
탐라의 백강 전투 참전은 탐라의 대외관계 향방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후 벌어진 백제와 신라 간 취리산 회맹(665.8) 및 태산 봉선(666.1)에 탐라가 계속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부흥운동은 백강 전투 패배 후 주류성과 임존성까지 함락당하면서 기세가 크게 꺾이며 종식되었다.
당 고종은 옛 백제 영역의 통치가 안정되자 태산에서의 봉선제사를 다시 추진하였다. 고종은 664년 7월에 666년 1월 태산에서 봉선할 것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공적이고 개방적인 봉선을 기획하였다. 이는 태산 봉선이 주변 국가를 총망라한 국제적인 행사로 추진되었음을 시사한다. 고종은 664년 7월 봉선 실시 선포와 동시에 주변 국가들에도 참가를 독려하는 사신을 보냈다. 665년 10월에 당 고종이 태산에 가기 위해 동도[낙양]를 출발할 때 외국 사신으로서 동쪽의 고구려․백제․신라․왜국으로부터 서쪽의 돌궐․파사․천축국 등이 행보를 함께 하였다.
이로써 보면, 664년 2월[웅령 회맹]과 665년 8월[취리산 회맹]에 당 측의 주선으로 거행된 신라와 백제 간 두 차례의 회맹도 봉선 개최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성격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취리산 회맹 후 유인궤는 곧바로 태산 봉선 참가를 위해 회맹 당사국인 백제․신라는 물론이거니와 탐라와 왜국까지 대동하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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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측은 일단 취리산 회맹의 참여 주체였던 웅진도독 부여융이 대표자였다. 신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이 사절단을 이끌고 태산의 봉선에 참여하였다. 당 고종은 불과 얼마 전인 662년까지 전쟁을 벌였고, 향후에도 가장 유력한 정벌 대상인 고구려에도 봉선 참여를 독려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에 고구려는 보장왕(642~668)의 태자 복남을 보내 봉선에 참가시켰다. 취리산 회맹 후 유인궤의 인솔하에 왜국도 신라․백제․탐라와 함께 태산 봉선에 참석하였다. 고종은 663년 8월 백강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러 패퇴시켰던 상대 국가를 회유하여 취리산 회맹을 참관하게 하고, 이어 태산 봉선까지 데려간 것이다. 그렇다면 탐라국도 다른 국가들에 준하는 중요 인물을 태산 봉선의 사신단으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7세기 중․후반 탐라의 대일 외교에서 주로 왕자가 활약했으므로, 태산 봉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봉선이 한창일 때인 666년 1월 탐라는 왕자 고여를 일본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렇지만 왕자는 여러 명 있을 수가 있다. 일례로 673년 탐라의 사신단으로서 일본에 간 왕자는 구마예‧도라‧우마 3명이었다. 태산 봉선을 전후한 시기 탐라의 왕자로 기록에 남겨진 인물은 각각 661년 5월과 669년 3월에 일본에 파견된 아파기와 구마기가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탐라 사신단을 이끌고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 고종은 주변 국가의 복속을 통해 이룬 평화의 구축을 하늘에 고하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거대한 의식을 태산 봉선으로 풀어냈다. 완벽한 봉선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벌 고구려를 설득하였고, 백강 전투 등에서 적국으로 맞서 싸웠던 백제․왜․탐라의 참가를 이끌어냈다.
탐라가 신라의 속국으로서 취리산 회맹과 태산에서의 봉선에 참가했다는 견해가 있다. 662년 2월 탐라국주가 문무왕을 찾아가 속국이 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탐라는 백제 측에 서서 663년 8월 백강 전투에 참전하였다. 탐라의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 참가는 그 연장선상에서의 외교 행보였다. 물론 이는 당 측의 의도와 기획에 따른 성격이 짙었다.
탐라는 왜국과 함께 백제 측에 선 국가로서 취리산 회맹과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탐라가 각종 기록에 삼국 및 왜국과 대등한 존재의 독립국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이 탐라를 독자적인 국가로 인식했고 그에 합당하게 대우했음을 시사한다. 탐라는 태산에서 개최된 봉선 참여를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몸소 느꼈을 법하다. 또한 봉선에 참가한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정보를 얻고 향후 외교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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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80호(2025.11)에 '7세기 중반 탐라의 외교 행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논문을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장창은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고대사 전공.





